브리안 보루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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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리안 보루마는 10세기 아일랜드의 왕이자 군사 지도자이다. 달 가이스 가문 출신으로 투어드무머의 왕을 거쳐 먼스터의 왕이 되었으며, 아일랜드의 최고 왕으로 즉위하여 통일을 시도했다. 그는 섀넌 강을 활용한 해군력과 육군을 결합한 수륙 양면 작전을 펼쳤으며,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를 구축하려 했다. 브리안은 1014년 클론타프 전투에서 레인스터와 바이킹 연합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그의 사후, 그의 업적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논쟁의 대상이 되었으며, 아일랜드 문화와 대중문화에 다양한 형태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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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안 보루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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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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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브라이언 보루 |
별칭 | 만스터 왕 |
통치 | |
아일랜드 고왕 | 1002년–1014년 |
만스터 왕 | 978년–1014년 |
정치 | |
아일랜드 고왕 | 전임자: 말 세크날 막 돔날 후임자: 말 세크날 막 돔날 (복원) |
만스터 왕 | 전임자: 말 무어드 막 브레인 후임자: 둥갈 막 말포하르타그 우어 돈카다 |
개인 정보 | |
출생 | 941년경 |
출생지 | 킬랄루, 만스터 왕국 킨코라 |
사망 | 1014년 4월 23일 |
사망 장소 | 클루안 타르브, 렌스터 왕국 |
종교 | 가톨릭 교회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케네티그 막 로르칸 |
어머니 | 베 빈 이니온 우르카드 |
배우자 | 모르, 에크라드, 고름플라흐, 두브 코블라그 |
자녀 | 무르카드, 콘코바르, 플란, 타드크, 돈카드, 돔날, 케르히얼파드 (입양), 사드브, 베 빈, 슬라너 |
기타 | |
왕가 | 오브라이언 |
2. 생애
브리안 보루마는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 아일랜드를 통일한 왕이다. 당시 아일랜드는 여러 왕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브리안은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정치적 수완으로 이들을 통합하고 아일랜드 역사상 최초로 실질적인 통일 왕국을 건설했다.[61]
브리안은 먼스터 지방의 소왕국 투어몬드의 왕자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달 가이스(Dál gCais) 부족의 일파로, 전통적으로 먼스터의 왕위를 차지해 온 에오가나흐타(Éoganachta) 가문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았다. 브리안은 형 마흐가만(Mathgamain)과 함께 먼스터의 지배권을 놓고 에오가나흐타 및 리머릭의 노르드인(바이킹) 세력과 경쟁했다.
976년 마흐가만이 죽자 브리안은 투어몬드의 왕위를 계승했고, 곧 먼스터 전체의 왕이 되었다. 그는 레인스터와 코나흐트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아일랜드 상왕(High King) 마엘 세흐나일 막 돔나일(Máel Sechnaill mac Domnaill)과 대립했다.
997년, 브리안과 마엘 세흐나일은 아일랜드를 남북으로 양분하는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브리안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1000년에 다시 마엘 세흐나일을 공격했다. 결국 1002년, 마엘 세흐나일은 브리안에게 상왕위를 양보했고, 브라이언은 아일랜드의 새로운 상왕이 되었다.[61]
브라이언은 명목상 상왕이 아닌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얼스터 지방을 정복하기 위해 10년 동안 전쟁을 벌였다. 브라이언은 육군과 해군을 효과적으로 연계하는 전략을 통해 얼스터를 제압하고, 1011년에는 아일랜드 전역의 인정을 받는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브라이언의 통일은 오래가지 못했다. 1012년, 레인스터 왕 몰 모르다 막 무르하다(Máel Mórda mac Murchada)가 반란을 일으켰다. 브라이언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고, 1013년 전투를 벌였다.
1014년 성금요일, 브라이언의 군대는 더블린 근교 클론타프에서 레인스터-더블린 연합군과 격돌했다. 이 전투에서 브라이언은 승리했지만, 그 자신도 전사하고 말았다. 클론타프 전투의 결과는 브라이언, 그의 아들 무르하(Murchad), 그리고 상대 몰 모르다(Máel Mórda)까지 죽는 혈투였다. ''얼스터 연대기''의 귀족 사망자 목록에는 아일랜드 왕, 노르드계 아일랜드인, 스코틀랜드인, 스칸디나비아인이 포함된다.[61]
브라이언의 죽음으로 아일랜드는 다시 분열되었고, 마엘 세흐나일이 상왕위를 되찾았다.
2. 1. 가문 배경 및 초기 생애
브리안 보루는 케네티그 막 로르칸(951년 사망)의 열두 아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Dál gCais의 왕이자 투어드무머(Thomond)의 왕이었으며, 오늘날의 클레어 주로, 당시에는 먼스터 북부의 하위 왕국이었다. Cennétig은 'rígdamna Caisil'로 묘사되었는데, 이는 그가 캐셜 또는 먼스터의 왕위 계승자이거나 후보("왕감")임을 의미했다.[8] 이는 나중에 삽입되었을 수도 있다. 브리안의 어머니는 Bé Binn inion Urchadh였으며, 이는 서부 코넛의 마이 쇼라의 왕이었던 Urchadh mac Murchadh(945년 사망)의 딸이었다.[9][8] 그들이 Uí Briúin Seóla에 속했기 때문에, 브리안이라는 이름, 즉 Dál gCais에서는 드문 이름을 받게 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8]브리안의 가족은 Dál gCais(또는 Deis Tuisceart)의 Ui Tairdelbach 지파에서 유래했다. 이 지파는 최근 전통적으로 Dál gCais의 왕을 배출했던 Ui Óengusso 지파로부터 권력을 빼앗았다. Uí Toirdhealbhach는 투어먼드에 대한 영향력을 확장했고, 925년 연대기에 따르면 Máel Gorm의 아들 Ánrothán이 코르코 무루드의 왕위를 차지했다. 934년에는 Reabachán mac Mothla가 사망했는데, 연대기에서 "Dál gCais의 왕"으로 언급되었다(이 용어가 처음 사용된 시점). 그가 사망한 같은 해에, 그의 아들 Dub Gilla는 브리안의 삼촌 Conghalach에게 살해당했고, 브리안의 할아버지 Lorcáin이 왕위를 계승했다고 한다. 그는 짧은 통치를 누린 후, 자신의 아들 Cinnéidigh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는데, 그는 Dál gCais의 첫 번째 왕으로서 자신의 영토 밖으로 군대를 이끌고 북쪽의 애슬론까지 원정했다. 951년 사망 당시 그는 "투어드무머의 왕"으로 인정받았다.[10] 그의 형제인 Mathgamain은 이러한 업적을 바탕으로 캐셜 바위를 점령하고 먼스터의 왕이 되었다.
브리안은 투아드무무 지역의 마을인 킬랄로에 있는 아버지의 거처 또는 요새인 킨코라에서 태어났다.[8] 브리안의 사후 별칭인 "보루마"(Boru로 영어화)는 벨 보루마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는데, 이곳은 킬랄로 북쪽에 위치한 요새로 달 가이스가 지배했다.[9][8][11] 또 다른 설명은, 아마도 늦은 (재-)해석일 수 있는데, 이 별명이 고대 아일랜드어 ''bóruma'' "소 조공의"를 나타내어 강력한 지배자로서의 그의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다.[9]
12명의 형제 중 막내였던 브리안은 아버지의 왕위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매우 낮았다. 어렸을 때 그는 수도원으로 보내져 라틴어와 아일랜드 역사를 공부했다. 그는 현대 킬라니 근처 케리 주의 이니스팔렌 섬에 있는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다.[12] 그의 교사이자 멘토는 이니스팔렌 연대기를 시작한 것으로 유명한 수도원의 수장이 된 에오가나크타 족장이자 저명한 수도승인 마엘수탄 우아 케르바일이었다. 우아 케르바일은 나중에 브리안의 ''안므차라''(고문)가 되었다.[13] 그러나 브리안이 10살이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가 리머릭의 바이킹과의 전투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불려갔다.[14]
브리안의 전기에 따르면, 그는 한때 리머릭의 바이킹이 달 가이스 요새를 습격하는 것을 목격했다. 요새는 섀넌 강둑에 위치해 있어 바이킹이 리머릭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 공격할 수 있었다. 이야기에 따르면 브리안, 마흐가마인, 그리고 다른 형은 요새 근처 언덕이나 고지대에서 소 떼를 돌보고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비명을 듣고 하늘에서 연기를 보며 산비탈에서 습격을 보았다. 그들은 마을로 달려갔지만 바이킹은 이미 떠난 후였다. 정착지는 불태워지고 약탈당했다. 브리안의 어머니는 살해되었고, 마을을 방어하던 브리안의 형제 여러 명과 많은 마을 사람들이 죽었다. 이 사건은 브리안에게 충격을 주었고 그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14]
섀넌 강은 코노트와 미데의 지방을 상대로 습격을 가하기 쉬운 경로였다. 브리안의 아버지 케네티그 막 로르케인과 그의 형 마흐가마인은 강을 이용한 습격을 감행했으며 어린 브리안도 의심할 여지 없이 참여했을 것이다. 이것은 그의 후일 경력에서 해군에 대한 그의 이해의 근본이 되었을 수 있다.
아버지가 죽자 투아드무무의 왕위는 브리안의 형 마흐가마인에게 넘어갔다. 브리안과 마흐가마인은 먼스터 전역에서 함께 활동했다.[15] 976년 마흐가마인이 사망했을 때 브리안이 그를 대신했다. 그 후 그는 먼스터 왕국 전체의 왕이 되었다.
많은 아일랜드 연대기에는 브라이언은 1014년 클론타프 전투에서 사망했을 때 88세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926년 또는 927년이라는 이른 시기에 브라이언이 태어났음을 의미한다.[62] 역산으로 얻을 수 있는 다른 생년을 나타내는 정보는 923년 또는 942년이다.[62]
2. 2. 형 마흐가만의 통치와 먼스터 왕위 계승
964년, 브라이언의 형 마흐감은 에오가나크타의 수도인 캐셜 바위를 점령하여 뮌스터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했다. 에오가나크타는 뮌스터의 세습적인 지배자 혹은 고왕이었지만, 왕조 내분과 여러 차례의 암살로 인해 쇠약해져 무력해진 상태였다. 우이 네일과 바이킹의 이전 공격 또한 요인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에오가나크타의 관점에서) 정통성이 없는 군사화된 달 카이스가 지방 왕위를 차지하도록 했다. 마흐감은 완전히 인정받지 못했으며, 960년대와 970년대 그의 경력 전체에서, 카셸의 관점에서 반역자였지만 여전히 뮌스터 남부에서 정통 에오가나흐타 계승자인 마엘 무아드에게 대항했다.[66]마엘 무아드 외에도, 노르드 왕 리머릭의 이바르가 위협이었으며, 그는 뮌스터 혹은 그 일부 지역에 지배권을 확립하려 했을 수 있다. 《아일랜드의 여러 국가와의 전쟁》은 그가 968년 마흐감과 브리안에 의해 술코이트 전투에서 격파될 때까지 실제로 이를 달성했다고 주장한다.
초기에 마흐감은 리머릭의 노르드인들과 평화를 맺었다. 그러나 브라이언은 바이킹에게 가족을 잃은 것에 대한 복수를 열망했고, 추종자들과 함께 탈주하여 뮌스터 산맥에서 바이킹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시작했다. 그들은 바이킹 요새와 순찰대를 공격했으며, 발견한 식량과 무기로 살아남았다. 공격은 바이킹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사상자가 늘어나 브라이언의 서기에 따르면, 단 15명의 병사만 남았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마흐감은 동생의 용기에 영감을 받아 브리안과 함께 바이킹을 공격하여 리머릭과 뮌스터에서 완전히 몰아내기로 결정했다.[14]
그들은 옛 적 마엘 무아드를 포함하여 뮌스터 전역의 왕들로 군대를 모았다. 술코이트 전투에서 노르드인들을 매복하여 격파하고, 승리에 이어 루임네흐 소각으로 리머릭을 약탈하고 불태웠다. 싸울 나이의 모든 남자를 죽이고 나머지를 노예로 삼았다.
이것은 브라이언의 경력을 빛낸 세 번의 전투 중 첫 번째였다. 이 승리는 결정적이지 않았으며, 결국 마흐감, 마엘 무아드 등은 972년에 노르드 "병사" 또는 "관리"를 뮌스터에서 몰아내고 리머릭 요새를 파괴하기 위한 일종의 짧은 동맹을 결성했다.[16] 두 갈릭 계승자는 곧 다시 싸우게 되었고, 976년 돈누반에 의해 마흐감이 우연히 사로잡히면서 마엘 무아드에 의해 살해되었고, 마엘 무아드는 2년 동안 카셸의 왕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마흐가마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달 가이스는 강력한 세력으로 남았다. 마흐가마인의 뒤를 이어 토몬드의 왕이 된 브라이언은 그의 형제 못지않은 훌륭한 군사 지휘관임을 증명했다. 977년에 쇠약해진 이바르를 공격하여 죽인 후, 브라이언은 남은 문스터의 바이킹 세력을 근절하려는 새로운 목표를 추구했다. 왕위에 오른 이바르, 즉 리머릭의 통치자 또는 지사는 죽은 이바르에게 충성을 바쳤고, 아들들과 함께 섀넌 강 하구로 배를 타고 도망쳐 이니시 캐타이그(스캐터리 섬)의 수도원에 피신했다. 그러나 브라이언은 형제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신성한 전통을 무시하고 병사들을 이끌고 섬을 공격하여 바이킹을 학살하고 교회를 훼손했다.[17]
978년경, 브라이언은 벨라흐 레크타 전투에서 마엘 무아드를 상대로 싸움을 걸어 그를 격파했다. 마엘 무아드는 이 전투에서 죽었고, 그 후 에오가나흐타는 가문을 기반으로 하는 지방 왕위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다. 따라서 문스터의 왕위는 달 가이스로 넘어갔고, 브라이언이 왕이 되었다.
이후, 문스터에 남아 있던 마지막 반대는 마흐가마인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도누반(도노반)이 이끄는 반란을 일으킨 아일랜드인과 이바르의 마지막 남은 아들이자 후계자로 지명된 아랄트(해롤드)가 이끌었을 가능성이 있는 남은 노르드/바이킹 세력의 연합이었다. 브라이언은 그들을 카히르 쿠안 전투에서 공격했는데, 이는 단일 전투였을 수도 있고 977~978년 기간 동안의 장기간의 분쟁이었을 수도 있다. 이 사건은 연대기에 언급되어 있으며, '코가흐'는 브라이언이 그의 적들에게 "대대적인 학살"을 가하여 도누반과 아랄트를 모두 죽이고, 그의 지방 내 지위를 확고히 했다고 묘사한다.[18]
그러나 그는 일부 노르드족이 그들의 정착지에 남도록 허용했는데, 그들이 부유했고, 특히 노예 무역으로 지역 무역의 중심이었으며, 브라이언이 나중에 해군 원정에 사용할 가치 있는 함대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38]
키안은 브라이언의 형제 마흐가마인의 숙적 마엘 무아드의 아들로, 나중에 브라이언의 충실한 동맹이 되어 여러 원정에서 그를 섬겼다.
2. 3. 레인스터 및 아일랜드 상왕과의 충돌
브리안은 자신의 고향인 먼스터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확고히 한 후, 동쪽의 레인스터와 북서쪽의 코나흐트 인접 지역으로 권위를 확장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미스 지방을 기반으로 하는 하이 킹 마엘 세흐나일 막 돔나일과 충돌하게 되었다.982년부터 997년까지 15년 동안 하이 킹 마엘 세흐나일은 레인스터와 먼스터로 군대를 이끌었고, 브리안은 아버지와 형처럼 약 300척의 해군[20]을 이끌고 섀넌 강을 거슬러 올라가 강의 양쪽에 있는 코나흐트와 미스를 공격했다. 그는 이 싸움에서 여러 차례 좌절을 겪었지만, 자신의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었다. 그는 육상과 해상 모두에서 병력을 조정하여 강과 아일랜드 해안을 따라 사용하는 군사 전략을 개발했는데, 이는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도움이 되었다. 브리안의 해군은 그가 통제하게 된 히베르노-노르드 도시(특히 워터포드)[20]에서 제공된 병력을 포함하여 육상 병력에 간접적, 직접적 지원을 제공했다. 간접적 지원은 브리안이 군대로 공격할 계획인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함대가 적을 기습 공격하는 것을 포함했다. 직접적 지원은 해군이 포위 공격의 한 축을 담당하고, 군대가 다른 축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996년에 브리안은 마침내 레인스터를 장악했고, 이는 이듬해 마엘 세흐나일이 그와 타협하게 된 계기가 되었을 수 있다. 두 왕은 페르마나 주의 로흐 리 기슭에 있는 블레안포토그에서 만나 합의를 했다.[23] 브리안의 권위를 ''레트 모가''(먼스터와 레인스터, 그리고 그 안에 있는 히베르노-노르드 도시를 포함하는 남쪽 절반)에 대해 인정함으로써, 마엘 세흐나일은 현실을 받아들였고, ''레트 쿠인''(미스, 코나흐트, 얼스터로 구성된 북쪽 절반)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했다.
레인스터 왕은 브리안의 권위에 복종했기 때문에 998년에 왕위를 빼앗기고 마엘 모르다 막 뮤르차다로 교체되었다. 마엘 모르다가 임명된 상황을 고려할 때, 그가 브리안의 권위에 대한 공개적인 반란을 일으킨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레인스터가 반란을 일으키자 브리안과 마엘 세흐나일의 왕국이 모두 위협받았고, 따라서 그들은 잠시 분쟁을 제쳐두고 레인스터를 격파하기로 결정했다.
브리안은 먼스터 주의 병력을 소집했고, 마엘 세흐나일은 더블린 왕국의 히베르노-노르드 도시인 더블린을 포위하기 위해 미스의 병력을 소집했는데, 이곳은 마엘 모르다의 동맹이자 사촌인 시그트리그 실크비어드가 통치하고 있었다. 마엘 모르다와 시그트리그는 브리안의 군대와 전투를 벌이는 것이 포위의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999년에 대립하는 군대는 글렌마마 전투에서 싸웠다. 아일랜드 연대기는 이 전투가 특히 치열하고 피비린내 나는 교전이었다는 데 동의하지만, 아침부터 자정까지 지속되었다거나 레인스터-더블린 연합군이 4,000명의 사상자를 냈다는 주장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어쨌든 브리안은 32년 전 술코이트 전투 이후 자신과 형이 했던 것처럼 승리 후 적의 도시를 점령하고 약탈했다.
시그트리그는 도시에서 도망쳐 얼스터의 왕들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울레이드에게 거부당하여 더블린으로 돌아가 브리안에게 복종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24] 브리안은 다시 한 번 화해를 선택했다. 그는 시그트리그에게 돌아와 더블린의 통치자 자리를 다시 맡아 달라고 요청하면서 시그트리그의 딸 중 한 명과 결혼했는데, 이는 그가 에오가나흐타 왕 키안과 했던 방식과 같았다. 아마도 이 기회에 브리안은 시그트리그의 어머니이자 마엘 모르다의 누이인 고름플라ith와 결혼했을 것인데, 그녀는 마엘 세흐나일의 전 부인이었다.
2. 4. 아일랜드 상왕 즉위와 통일 전쟁
997년의 타협으로 자신의 야망이 채워지지 않았음을 분명히 한 브리안은 1000년, 말 세크나일 막 도마일의 본거지인 미스주를 공격하기 위해 먼스터, 레인스터, 더블린 연합군을 이끌었다. 이로써 아일랜드 전체를 누가 지배할 것인가에 대한 다툼이 다시 시작되었다. 말 세크나일의 가장 중요한 동맹은 코나흐트의 왕인 카할 막 콘코바 막 타이드그였지만, 섀넌강으로 인해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섀넌강은 브리안의 해군이 두 주의 해안을 공격할 수 있는 통로이자 두 통치자가 서로를 지원하는 데 방해가 되는 장벽 역할을 했다. 말 세크나일은 섀넌강에 두 개의 다리를 건설하는 기발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이 다리는 브리안의 함대가 섀넌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막는 장애물이자, 미스주와 코나흐트주의 군대가 서로의 왕국으로 건너갈 수 있는 수단이 될 것이었다.《연대기》는 1002년에 말 세크나일이 브리안에게 칭호를 넘겨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그 과정이나 이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코가드 게일 레 갈라입》에는 브리안이 타라 언덕에서 말 세크나일 고왕에게 전투를 제안했지만, 고왕이 군대를 동원할 수 있도록 한 달간의 휴전을 요청했고 브리안이 이를 수락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마감 기한이 다가오자 말 세크나일은 명목상 자신의 부하인 지역 통치자들을 소집하는 데 실패했고, 브리안에게 칭호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브리안의 전쟁 방식을 고려할 때 몇 가지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만약 그가 상대방에게 불리한 상황을 발견했다면, 그는 적에게 전력을 회복할 시간을 주기보다는 이를 최대한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말 세크나일과 브리안 사이의 싸움의 기간과 강도를 고려할 때, 고왕이 싸움 없이 칭호를 포기했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어쨌든 1002년에 브리안이 아일랜드의 새로운 고왕이 되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당시 아일랜드는 인구가 50만 명 미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크고 작은 지역에 150명 이상의 왕이 난립했다.[61]
이전 아일랜드 상왕이었던 남 에오간의 왕 돔나일의 아들 몰 세크닐은 동족인 북 에오간의 주력인 두 분가 케넬 에오간과 케넬 코닐에게 버려졌음에도 불구하고 1002년 애슬론에서 브라이언을 새로운 상왕으로 인정했다. 이후 10년 동안 브라이언은 그의 권한을 거부한 북 에오간, 빈번히 저항했던 레인스터 지방, 노르드계 아일랜드인의 더블린 왕국에 대항해 싸웠다.
브라이언이 어렵게 얻은 권위는 1013년, 동맹자 몰 세크닐이 케넬 에오간 왕 플라이스바르타흐 우어 네일과 얼스터인에게 공격받았을 때 심각한 시련을 겪었다. 이 시련은 더블린 왕 시트릭 실크비어드 휘하의 더블린인과 레인스터 왕 몰 모르다 막 무르하다가 이끄는 레인스터인에 의한 몰 세크닐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1013년 브라이언은 이 적들과 전투를 벌였다.
1014년 성금요일, 브라이언의 군대는 더블린 근교의 클론타프에서 레인스터-더블린 연합군과 충돌했다. 클론타프 전투의 결과는 브라이언, 그의 아들 무르하(Murchad), 그리고 상대 몰 모르다(Máel Mórda)까지 죽는 혈투였다. ''얼스터 연대기''의 귀족 사망자 목록에는 아일랜드 왕, 노르드계 아일랜드인, 스코틀랜드인, 스칸디나비아인이 포함된다. 이 대량 학살에서 가장 혜택을 받은 사람은 아일랜드 상왕으로 복위한 몰 세크닐이었다.
노르드계 아일랜드인과 스칸디나비아인도 ''니알의 사가'', ''오크니의 사가'', 흩어진 ''브라이언의 사가''와 같은 작품에서 브라이언을 언급했다. 브라이언의 몰 모르다 및 시트릭과의 전쟁은 브라이언의 복잡한 혼인 관계, 특히 아내 고름라이트와의 관계와 얽혀 있었다.
브라이언의 야망은 997년의 화해로는 채워지지 않았다. 1000년, 그가 상왕 몰 세크넬의 영지 미스 지방을 향해 먼스터-레인스터-더블린 연합군을 이끌고 공격을 감행하면서 이는 더욱 분명해졌다. 아일랜드 전토의 패권을 둘러싼 다툼이 재개된 것이다.
몰 세크넬의 가장 중요한 동맹자는 [코노트 왕](https://en.wikipedia.org/wiki/King_of_Connacht) [타이그의 아들 콘호바르의 아들 카할](https://en.wikipedia.org/wiki/Cathal_mac_Conchobar_mac_Taidg) 이었으나, 이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미스 지방과 코노트 지방은 섀넌 강에 의해 분단되어 있었는데, 이는 브라이언의 해군이 양쪽 지방의 해안을 공격할 수 있는 루트인 동시에 두 지배자가 서로 공격할 때의 장벽으로 기능했다. 몰 세크넬은 섀넌 강에 두 개의 다리를 놓는 독창적인 해결책을 생각해냈다. 이 다리들은 섀넌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브라이언의 함대를 방해하는 장애물로 기능하는 동시에, 미스 지방과 코노트 지방의 군대가 서로의 왕국을 오갈 수 있는 수단으로 작용할 것이었다.
여러 연대기에서는 1002년에 몰 세크넬이 상왕의 칭호를 브라이언에게 양도했다고 언급하고 있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다.
''아일랜드의 제국과의 전쟁''에서는, 브라이언이 미스 지방의 타라의 언덕에서 상왕 몰 세크넬에게 전투를 신청했고 상왕은 군대를 동원하기 위해 한 달의 휴전을 요구했지만, 몰 세크넬은 그의 신하인 각 지역의 지배자들을 기한 내에 모을 수 없었기 때문에, 브라이언에게 칭호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브라이언의 전투 방식을 고려해 볼 때, 이 설명에는 몇 가지 의문이 있다. 만약 그가 적을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에서 발견했다면, 어설프게라도 적에게 시간을 주기보다는 그 우위를 충분히 활용했을 것이다. 또한, 몰 세크넬과 브라이언 사이의 전투의 길이와 격렬함을 고려할 때, 상왕이 싸우지 않고 칭호를 양도한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실제로 전투가 벌어졌는지, 그리고 그 전투가 특수한 상황 하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의심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1002년에 브라이언은 새로운 아일랜드 상왕으로 즉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전까지 이 칭호를 가지고 있던 몇몇 인물들과 달리, 브라이언은 명목상이 아닌 실질적인 상왕이 되려고 했지만, 이를 달성하기 위해 그는 아직 자신의 상왕으로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한 지역인 얼스터 지방의 지배자를 자신의 뜻대로 따르게 할 필요가 있었다.
얼스터의 지리적 특성은 브라이언에게 어려운 과제를 안겨주었다. 침략군이 그 땅에 들어가는 경로는 세 가지가 있었지만, 그 어느 곳도 방어하는 쪽에 유리했다. 브라이언은 먼저 이러한 방어의 초크 포인트 (군사 항로)를 통과하거나 우회하는 수단을 찾아야 했으며, 그 위에 자치 지역인 얼스터 왕을 엄격하게 진압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브라이언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10년을 소요했고, 아일랜드의 나머지 군사력을 모두 얼스터에 투입한 것은, 얼스터 왕이 얼마나 강력한 상대였는지를 보여준다. 다시 한번 브라이언은 그에게 승리를 가져다준 육해군 작전을 사용했다. 얼스터의 지배자들은 브라이언의 진군을 막을 수 있었지만, 그의 함대가 그들의 왕국의 해안을 공격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얼스터 지방에 발을 들여놓는 것은 브라이언에게 목표의 절반을 달성한 것에 불과했다. 브라이언은 반항하는 각 지역의 지배자들을 질서 정연하게 격파하고, 그들에게 군림하는 왕임을 인정하게 했다.
브라이언은 얼스터 지방의 제압과 병행하여 아일랜드 전역에 대한 그의 관리를 강화하기 위한 다른 수단을 진행했다. 다른 유럽 지역과 달리, 아일랜드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구의 주교나 대주교구의 대주교를 중심으로 하기보다는, 오히려 수도원이 있는 토지의 왕조의 일원인 권력을 가진 수도원장이 있는 수도원을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가장 중요한 수도원은 얼스터 지방에 위치한 아마였다.
브라이언의 고문 몰스한 오카롤은 '아마의 서'에서 1005년에 브라이언은 수도원에 금 약 623.69g를 기부하고, 아마는 아일랜드의 종교적인 수도이며 모든 다른 수도원은 모금한 자금을 보내야 한다고 선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현명한 행동이었는데, 브라이언이 상왕의 지위에 있는 한 아마 수도원의 우위성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브라이언을 모든 부와 힘으로 지지하는 것은 아마를 위한 행위가 되었다.
브라이언이 '아마의 서'의 그 구절에서 '상왕'(Ard Rí)으로 언급되지 않고, "''스코토럼(Scottorum) 전제군주''" 또는 "아일랜드의 황제"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흥미롭다. ("스코토럼"(Scottorum)은 아일랜드에서 후기 라틴어의 일반적인 어휘이다. 스코틀랜드가 "소 스코티아"(Scotia Minor)라고 불리던 때에 아일랜드는 일상적으로 "대 스코티아"(Scotia Major)라고 언급되었다.)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지만 이는 브라이언과 당시 아일랜드 교회가 공동으로 아일랜드의 왕위의 새로운 형태를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왕위를 본떠 확립하려 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더 이상 각 지역의 왕은 존재하지 않고, 단일 국가에서 그 전역에 권위가 미치는 단 한 명의 왕만이 존재한다.
어쨌든 상왕이든 황제이든 1011년에 모든 아일랜드 각 지역의 지배자는 브라이언의 권위를 인정했다. 이것은 일단 달성되었지만, 곧 다시 잃었다.
렌스터의 몰 모르다는 일단 브라이언의 권위를 마지못해 받아들였지만, 1012년에 반기를 들었다. ''아일랜드의 제국과의 전쟁''은 브라이언의 아들 중 한 명이 몰 모르다를 모욕한 것과, 그것이 브라이언의 권위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게 된 것에 연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 이유가 무엇이든, 몰 모르다는 반 상왕 동맹을 맺을 상대를 찾았고, 최근 브라이언에게 항복한 얼스터 지방의 지역 지배자를 찾았다. 그들은 공동으로 미스 지방을 공격했고, 토지의 지배자인 선대 상왕 몰 세크네르는 왕국의 방어를 위해 브라이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013년에 브라이언은 문스터 지방과 코노트 지방 남부에서 군기를 들고 렌스터 지방으로 들어갔고, 아들 므라하의 부대는 3개월 동안 렌스터 지방의 남쪽 절반을 약탈했다. 므라하와 브라이언의 군대는 9월 9일에 더블린의 성벽 밖에서 다시 합류했다. 더블린 도시는 봉쇄되었다. 그러나 상왕의 군대가 먼저 물자가 떨어졌기 때문에 브라이언은 포위전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크리스마스 전에 문스터로 돌아갔다.
2. 5. 클론타프 전투와 최후

몰 모르다는 1014년에 상왕에게 패배하기 위해 다시 더블린으로 돌아올 것을 깨달았다. 그는 브라이언에게 반기를 든다면 브라이언이 복종을 강요했던 다른 지역의 모든 지배자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매우 실망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얼스터 지방 전체와 코노트 지방의 대부분이 상왕에게 군대를 제공하지 않았지만, 얼스터의 한 지배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 모르다를 지원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아일랜드의 어떤 지배자로부터도 군대를 얻을 수 없었던 것은 몰 모르다가 아일랜드 국외의 지배자로부터 군대를 얻으려 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는 자신의 부하와 사촌인 더블린의 지배자 시트릭에게 지원을 얻기 위해 국외로 갈 것을 지시했다.
시트릭은 오크니 제도로 건너갔고, 그 다음 맨 섬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이 섬들은 훨씬 이전부터 바이킹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아일랜드계 노르만족은 오크니 제도 및 맨 섬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실제로 980년에 시트릭의 아버지 아브라브 쿠아란과 990년에 시트릭 자신이 섬들의 노르만족을 고용했던 전례가 있었다. 다만, 그들의 동기는 토지가 아닌 약탈이었다. ''아일랜드의 여러 국가와의 전쟁'' 주장을 부정하게 되지만, 아일랜드를 빼앗으려는 바이킹의 계획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더블린의 노르만계 아일랜드인과 맨 섬에서 온 노르만족은 모두 몰 모르다의 군대에 들어갔다. 그러나 상왕 역시 자신의 군대에 바이킹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리머릭을 시작으로 아마도 워터포드, 웩스포드, 코크와 같은 도시의 아일랜드계 노르만족, 그리고 몇몇 출처에 따르면 맨 섬에서 온 노르만족 용병들과 앙숙 관계에 있는 집단이 이에 해당한다. 기본적으로, 외국인들이 소수파로 참가한 것이 이 아일랜드 내전을 특징짓고 있다.[67]
몰 모르다가 국외에서 얻은 어떤 군대와 함께라도, 브라이언이 조직한 군대는 지역 먼스터 지방 및 코노트 지방 남부의 군대, 그리고 오랜 숙적 몰 세크넬의 명령을 받은 미스 지방의 남자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막내 아들 도나하 휘하의 기마 분대에 (아마도 몰 모르다의 군대를 격퇴하기를 기대하며) 남렌스터를 습격하도록 명령한 데 충분히 안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수적으로 몰 모르다의 군대를 압도했을지도 모른다.
상왕에게 불행하게도, 수적으로 우세했다면 그것은 곧 사라졌다. 미스 왕과의 불화는 몰 세크넬이 원군의 파견을 거부하게 만들었다. (브라이언은 도나하를 찾아 분대와 함께 돌아오도록 사자를 보냈지만, 그 소식이 도착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의 문제를 악화시킨 것은, 오크니 백작 흘로드비르의 아들 시구르드와 맨 섬의 브로디르가 이끄는 노르만족 파견단이 4월 18일 성지 주일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전투는 성 금요일인 5일 후인 4월 23일에 일어났다.[68]

전투는 정확히 더블린 도시의 북쪽 클론타프에서 일어났다. 어떤 사서도 이 클론타프 전투가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는 것처럼, 양측의 세력은 정확히 균형을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이 사서의 기술은 과장일 수도 있지만, 길고 끈질긴 전투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브라이언의 죽음에 대한 많은 기록이 있다. 일부는 그가 영웅적인 일대일 전투 중에 사망했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그의 노령과 허약함 때문에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명시한다.[34] ''Cogadh Gaedhel re Gallaibh''에 따르면, 노령의 브리안 보루는 죽기 전날 전투에서 떨어져 나와 방석에 무릎을 꿇고 시편, 주기도문, 성모송, 그리고 다른 기도들을 묵주를 사용하여 불렀다. 그는 자신의 측근으로부터 자신의 군대가 큰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들 머르카의 기가 막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 도망치는 바이킹 용병에게 살해당했다.[36]
가장 흔한 기록들은 브리안 보루의 살해가 맨 섬의 바이킹 용병 브로디르에 의해 일어났으며, 그는 클론타프의 자신의 텐트에서 기도하던 중이었다고 말한다.[37][38] 12세기의 ''Cogad Gáedel re Gallaib''에 따르면, 브리안은 전투 전날 밤 꿈속에서 아일랜드 신화의 투아하 데 다난 출신의 아벨이라는 성 파트리치오 이후 요정 여왕으로 격하되어 톰몬드의 켈트족의 저승을 다스리며 브리안 왕의 씨족과 왕조의 수호신, 보호자, 그리고 반시로 여겨지던 여신에게 방문을 받았다. 꿈에서 아벨은 브리안에게 그의 임박한 죽음을 경고했으며, 아침에 가장 먼저 보게 될 아들이 그를 계승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꿈이 자신의 운명을 예언한다고 믿고, 또한 아들 머르카보다 오래 살고 싶지 않았던 브리안은 후퇴하는 바이킹으로부터 피난처를 찾는 것을 거부했으며, 중요한 순간에 그의 경호원들마저 해산했다.[39]
''Cogadh Gaedhel re Gallaibh''는 브리안 보루와 브로디르가 햄릿과 라에르테스처럼 대면했을 때, 그들이 이룬 것은 서로를 죽이는 것뿐이라고 주장한다.[40] 반면에, ''Njáls 사가''에 따르면, 브로디르는 그 직후 거의 즉시 체포되어, 브리안의 경호원이자 결혼을 통해 관계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울프 더 쿼럴섬에 의해 잔인하게 고문을 받아 죽었다. 브로디르의 배는 먼저 칼로 찢어졌고, 그의 내장은 나무에 묶였으며, 브로디르는 나무 주위를 빙빙 돌도록 강요받아 과다 출혈과 내장 제거로 인한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41]
그의 죽음 이후, 브리안의 시신은 브로디르가 도착하기 직전에 그가 지시한 대로, 미사곡을 위해 현재 더블린 주 스워즈에 있는 스피털 힐의 교회로 옮겨졌고, 그 후 아마로 옮겨져 성 파트리치오가 세운 대성당에 묻혔다. 그의 묘는 아마 시의 아일랜드 교회의 성 패트릭 대성당 북쪽 벽에 있다고 한다.[42]
브리안 보루의 시신이 그의 죽음 이후 그의 고향인 먼스터로 옮겨졌다는 추가 보고가 있었다. 린스터/먼스터 경계에 있는 얼링포드 외곽에 위치한 그레인이라는 지역을 지날 때, 브리안의 군대가 공격을 받았고 그의 시신은 그가 군대를 지휘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나무에 묶였다. 나중에는 그의 군대가 이 지역에 있었음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유물—칼과 의복—이 발견되었다.[43] 오늘날 그레인 언덕에는 두 지방을 분리하는 벽이 있으며, 오소리와 카셸 교구를 연결하는 주요 도로였던 좁은 길이 여전히 존재한다.
브리안의 뒤를 이어 아일랜드의 최고 왕이 된 사람은 그의 전 적이자 나중에는 동맹이 된 마엘 세크나일 막 도브나일 (말라키 모어)이었다. 그는 브리안에게 수년 전에 잃었던 칭호를 되찾았다. 그는 1022년 사망할 때까지 통치했다.[44][45]
3. 정치 및 군사적 업적
브리안은 달 가이스 가문 출신으로 형 마흐가마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978년 벨라흐 레크타 전투에서 마엘 무아드를 격파하고 문스터의 왕이 되었다.[17] 이후 카히르 쿠안 전투에서 마흐가마인을 죽인 도누반과 이바르의 아들 아랄트를 제거하여 문스터 내 지배권을 확립했다.[18]
브리안은 먼스터를 평정한 후, 동쪽의 레인스터와 북서쪽의 코나흐트로 세력을 확장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미스 왕국을 다스리던 아일랜드 최고 왕 마엘 세흐나일 막 돔나일과 충돌하게 되었다. 982년부터 997년까지 15년 동안 브리안은 섀넌 강을 이용한 해군 활동과 육상 병력을 결합한 전략으로 마엘 세흐나일과 대립했다.
996년, 브리안은 레인스터를 장악하고, 이듬해 마엘 세흐나일과 타협하여 아일랜드 남부 (레트 모가)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23] 999년 글렌마마 전투에서 레인스터-더블린 연합군을 격파하고 더블린을 점령한 후, 시그트리그 실크비어드를 복위시키고 자신의 딸과 결혼시키는 등 화해 정책을 펼쳤다.
1000년, 브리안은 미스를 공격하며 아일랜드 전체의 지배권을 노렸다. 1002년, 마엘 세흐나일은 브리안에게 최고 왕위를 넘겨주었다. 이후 브리안은 10년에 걸친 얼스터 원정을 통해 1011년까지 아일랜드 전역을 통일했다.[24] 그는 아르마를 종교적 수도로 선포하고, 자신을 '게일족의 황제'(Imperator Scotorum|임페라토르 스코토룸la)[25]로 칭하며 중앙 집권적 통치를 시도했다.
3. 1. 해군력 활용과 수륙 양면 작전
브라이언은 자신의 고향인 먼스터를 완벽하게 지배하게 된 후, 동쪽의 레인스터와 북서쪽의 코나흐트 인접 지역으로 권위를 확장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그의 권력 기반이 미스인 하이 킹 마엘 세흐나일 막 돔나일과 충돌하게 되었다.982년부터 997년까지 15년 동안 하이 킹 마엘 세흐나일은 레인스터와 먼스터로 군대를 이끌었고, 브라이언은 아버지와 형처럼 약 300척의 해군[20]을 이끌고 섀넌 강을 거슬러 올라가 강의 양쪽에 있는 코나흐트와 미스를 공격했다. 그는 이 싸움에서 여러 차례 좌절을 겪었지만, 자신의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경력 전반에 걸쳐 도움이 될 군사 전략을 개발했다. 즉, 육상과 해상 모두에서 병력을 조정하여 강과 아일랜드 해안을 따라 사용하는 것이었다. 브라이언의 해군은 그가 통제하게 된 히베르노-노르드 도시(특히 워터포드)[20]에서 제공된 병력을 포함하여 육상 병력에 간접적이고 직접적인 지원을 제공했다. 간접적 지원은 브라이언이 군대로 공격할 계획인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함대가 적을 기습 공격하는 것을 포함했다. 직접적 지원은 해군이 포위 공격의 한 축을 담당하고, 군대가 다른 축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3. 2.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 구축 시도
달 가이스는 마흐가마인이 죽은 뒤에도 강력한 세력으로 남았다. 마흐가마인의 뒤를 이어 토몬드의 왕이 된 브라이언은 형 못지않은 훌륭한 군사 지휘관임을 빠르게 증명했다. 977년, 약해진 이바르를 공격하여 죽인 후, 브라이언은 문스터에 남아있는 바이킹 세력을 몰아내려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왕위에 오른 리머릭의 통치자 이바르는 아들들과 함께 섀넌 강 하구로 도망쳐 이니시 캐타이그(스캐터리 섬)의 수도원에 피신했다. 그러나 브라이언은 형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병사들을 이끌고 섬을 공격하여 바이킹을 학살하고 교회를 훼손했다.[17]978년경, 브라이언은 벨라흐 레크타 전투에서 마엘 무아드를 격파했다. 마엘 무아드는 이 전투에서 죽었고, 이후 에오가나흐타 가문은 더 이상 지방 왕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문스터의 왕위는 달 가이스로 넘어갔고, 브라이언이 왕이 되었다.
이후 문스터에 남아 있던 마지막 저항 세력은 마흐가마인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도누반(도노반)이 이끄는 아일랜드인과 이바르의 마지막 남은 아들 아랄트(해롤드)가 이끌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노르드/바이킹 세력의 연합이었다. 브라이언은 카히르 쿠안 전투에서 그들을 공격하여 도누반과 아랄트를 모두 죽이고,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18]
그러나 브라이언은 일부 노르드족이 정착지에 남도록 허용했다. 그들은 부유했고, 특히 노예 무역으로 지역 무역의 중심이었으며, 브라이언이 나중에 해군 원정에 사용할 가치 있는 함대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38]
키안은 브라이언의 형 마흐가마인의 숙적 마엘 무아드의 아들로, 나중에 브라이언의 충실한 동맹이 되어 여러 원정에서 그를 섬겼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키안은 나중에 브라이언의 딸 중 한 명인 사드브(1048년 사망)와 결혼했다고 한다.
브라이언은 얼스터 지방을 제압함과 동시에 아일랜드 전역에 대한 그의 통치를 강화하기 위한 다른 수단을 추진했다. 다른 유럽 지역과 달리, 아일랜드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구의 주교나 대주교구의 대주교를 중심으로 하기보다는, 수도원이 있는 토지의 왕조의 일원인 권력을 가진 수도원장이 있는 수도원을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가장 중요한 수도원은 얼스터 지방에 위치한 아마였다.
브라이언의 고문 몰스한 오카롤은 '아마의 서'에서 1005년에 브라이언은 수도원에 금 22온스를 기부하고, 아마는 아일랜드의 종교적인 수도이며 모든 다른 수도원은 모금한 자금을 보내야 한다고 선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현명한 행동이었는데, 브라이언이 상왕의 지위에 있는 한 아마 수도원의 우위성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브라이언을 모든 부와 힘으로 지지하는 것은 아마를 위한 행위가 되었다.
브라이언이 '아마의 서'의 그 구절에서 '상왕'(Ard Rí)으로 언급되지 않고, "''스코토럼(Scottorum) 전제군주''" 또는 "아일랜드의 황제"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흥미롭다. ("스코토럼"(Scottorum)은 아일랜드에서 후기 라틴어의 일반적인 어휘이다. 스코틀랜드가 "소 스코티아"(Scotia Minor)라고 불리던 때에 아일랜드는 일상적으로 "대 스코티아"(Scotia Major)라고 언급되었다.)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지만 이는 브라이언과 당시 아일랜드 교회가 공동으로 아일랜드의 왕위의 새로운 형태를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왕위를 본떠 확립하려 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더 이상 각 지역의 왕은 존재하지 않고, 단일 국가에서 그 전역에 권위가 미치는 단 한 명의 왕만이 존재한다.
어쨌든 상왕이든 황제이든 1011년에 모든 아일랜드 각 지역의 지배자는 브라이언의 권위를 인정했다. 이것은 일단 달성되었지만, 곧 다시 잃었다.
렌스터의 몰 모르다는 일단 브라이언의 권위를 마지못해 받아들였지만, 1012년에 반기를 들었다. ''아일랜드의 제국과의 전쟁''은 브라이언의 아들 중 한 명이 몰 모르다를 모욕한 것과, 그것이 브라이언의 권위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게 된 것에 연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 이유가 무엇이든, 몰 모르다는 반 상왕 동맹을 맺을 상대를 찾았고, 최근 브라이언에게 항복한 얼스터 지방의 지역 지배자를 찾았다. 그들은 공동으로 미스 지방을 공격했고, 토지의 지배자인 선대 상왕 몰 세크네르는 왕국의 방어를 위해 브라이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013년에 브라이언은 문스터 지방과 코노트 지방 남부에서 군기를 들고 렌스터 지방으로 들어갔고, 아들 므라하의 부대는 3개월 동안 렌스터 지방의 남쪽 절반을 약탈했다. 므라하와 브라이언의 군대는 9월 9일에 더블린의 성벽 밖에서 다시 합류했다. 더블린 도시는 봉쇄되었지만, 상왕의 군대가 먼저 물자가 떨어졌기 때문에 브라이언은 포위전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크리스마스 전에 문스터로 돌아갔다.
3. 3. 아일랜드 통일과 그 한계
978년경, 브리안은 벨라흐 레크타 전투에서 마엘 무아드를 상대로 승리했다. 이 전투에서 마엘 무아드가 사망하면서 에오가나흐타 가문은 더 이상 문스터의 왕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문스터 왕위는 달 가이스 가문으로 넘어가 브리안이 왕이 되었다.[17]이후 문스터에 남아있던 마지막 저항 세력은 마흐가마인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도누반이 이끄는 아일랜드인들과, 이바르의 마지막 남은 아들이자 후계자로 지명된 아랄트가 이끄는 노르드/바이킹 세력의 연합이었다. 브리안은 카히르 쿠안 전투에서 이들을 공격하여 도누반과 아랄트를 모두 죽이고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18] 그러나 브리안은 노르드인들이 부유하고 무역에 능숙하며, 해군력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정착지에 남는 것을 허용하였다.[38]
브리안은 먼스터를 완전히 지배하게 된 후, 동쪽의 레인스터와 북서쪽의 코나흐트로 자신의 권력을 확장하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미스 왕국을 기반으로 하는 하이 킹 마엘 세흐나일 막 돔나일과 충돌하게 되었다.
982년부터 997년까지 15년 동안, 하이 킹 마엘 세흐나일은 레인스터와 먼스터로 군대를 이끌었고, 브리안은 해군[20]을 이끌고 섀넌 강을 거슬러 올라가 코나흐트와 미스를 공격했다. 그는 여러 차례 좌절을 겪었지만, 육상과 해상 병력을 함께 활용하는 군사 전략을 개발하였다. 브리안의 해군은 히베르노-노르드 도시(특히 워터포드)[20]에서 제공된 병력을 포함하여 육상 병력에 직간접적인 지원을 제공했다.
996년, 브리안은 마침내 레인스터를 장악했고, 이듬해 마엘 세흐나일은 브리안과 타협하게 되었다. 두 왕은 페르마나 주의 로흐 리에서 만나 브리안의 권위를 ''레트 모가''(먼스터와 레인스터를 포함하는 남쪽 절반)에 대해 인정하고, 마엘 세흐나일은 ''레트 쿠인''(미스, 코나흐트, 얼스터로 구성된 북쪽 절반)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기로 합의하였다.[23]
998년, 레인스터 왕이 브리안에게 반기를 들자, 브리안과 마엘 세흐나일은 힘을 합쳐 레인스터를 격파하기로 결정했다. 999년, 글렌마마 전투에서 브리안은 승리하고 더블린을 점령했다. 브리안은 시그트리그 실크비어드를 더블린의 통치자로 복귀시키고 자신의 딸과 결혼시키는 등 화해 정책을 펼쳤다.
1000년, 브리안은 마엘 세흐나일 막 돔나일의 본거지인 미스 주를 공격하면서 아일랜드 전체를 지배하기 위한 다툼을 다시 시작했다. 1002년, 마엘 세흐나일은 브리안에게 칭호를 넘겨주었고, 브리안은 아일랜드의 새로운 하이 킹이 되었다.
브리안은 얼스터 지역을 정복하기 위해 10년 동안 원정을 벌였다. 그는 육상 및 해상 군대를 활용하여 얼스터의 저항을 극복하고, 1011년까지 아일랜드의 모든 지역 통치자들로부터 복종을 받아냈다.[24]
브리안은 아르마를 아일랜드의 종교적 수도로 선포하고, 자신을 '게일족의 황제'(Imperator Scotorumla)[25]로 칭하며 중앙 집권적인 왕권을 확립하려 했다.
4. 역사적 평가와 유산
브리안은 자신의 고향인 먼스터를 완벽하게 지배한 후, 동쪽의 레인스터와 북서쪽의 코나흐트 인접 지역으로 권위를 확장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그의 권력 기반이 미스 왕국인 하이 킹 마엘 세흐나일 막 돔나일과 충돌하게 되었다.
982년부터 997년까지 15년 동안 하이 킹 마엘 세흐나일은 레인스터와 먼스터로 군대를 이끌었고, 브라이언은 약 300척의 해군[20]을 이끌고 섀넌 강을 거슬러 올라가 강의 양쪽에 있는 코나흐트와 미스를 공격했다. 그는 여러 차례 좌절을 겪었지만, 자신의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육상과 해상 모두에서 병력을 조정하여 강과 아일랜드 해안을 따라 사용하는 군사 전략을 개발했다. 브리안의 해군은 그가 통제하게 된 히베르노-노르드 도시(특히 워터포드)[20]에서 제공된 병력을 포함하여 육상 병력에 간접적이고 직접적인 지원을 제공했다. 간접적 지원은 브리안이 군대로 공격할 계획인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함대가 적을 기습 공격하는 것을 포함했다. 직접적 지원은 해군이 포위 공격의 한 축을 담당하고, 군대가 다른 축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이 분쟁은 982년에 오스라게 왕국을 상대로 원정을 벌이던 브리안이 웨스트미스 주로 군대를 이끌고 들어가 그 땅을 약탈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앞서, 먼스터가 방어되지 않은 틈을 타 마엘 세흐나일은 달 가이스를 공격하여 달 가이스의 많은 족장들이 대관식을 올린 아다르의 신성한 나무를 파괴했는데, 여기에는 브라이언의 아버지 케네티그, 형 마트가마인, 그리고 브라이언 자신이 포함되었다. 브리안의 함대는 함대 중대가 코나흐트를 공격했을 때 좌절을 겪었는데, 거기에서 코나흐트의 왕자 뮤르기우스를 죽였고, 그는 방어자들 중 한 명이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코나흐트 사람들은 배를 공격하여 승무원을 학살했다.[22]
마엘 세흐나일은 먼스터로 반격을 가했고, 그 후의 전투에서 달 가이스를 격파하여 브리안의 삼촌을 포함하여 약 600명의 병사를 죽였다. 그 후 약 9년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가 있었고, 브라이언은 남쪽과 동쪽에서 자신의 권력을 확장하려 하면서 다른 곳에서 계속 원정을 벌였다.[21]
993년에 브라이언은 먼스터의 많은 부분을 장악하고 레인스터에서 세력을 확장했으며, 자신의 해군 우위를 활용하여 마엘 세흐나일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그의 함대는 섀넌 강을 거슬러 올라가 현재의 레트림 주와 캐번 주에 해당하는 브레이프네 왕국을 침공했다. 이로써 그는 북쪽과 남쪽 모두에서 공격을 받을 수 있게 되면서 하이 킹에게 압력을 가했다.[21]
996년에 브라이언은 마침내 레인스터를 장악했고, 이는 이듬해 마엘 세흐나일이 그와 타협하게 된 계기가 되었을 수 있다. 두 왕은 페르마나 주의 로흐 리 기슭에 있는 블레안포토그에서 만나 합의를 했다.[23] 브리안의 권위를 ''레트 모가''(먼스터와 레인스터, 그리고 그 안에 있는 히베르노-노르드 도시를 포함하는 남쪽 절반)에 대해 인정함으로써, 마엘 세흐나일은 그에게 직면한 현실을 받아들였고, ''레트 쿠인''(미스, 코나흐트, 얼스터로 구성된 북쪽 절반)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했다.
998년, 마엘 모르다 막 뮤르차다가 레인스터 왕이 되었으나, 브리안의 권위에 반기를 들었다. 브리안과 마엘 세흐나일은 연합하여 999년 글렌마마 전투에서 레인스터-더블린 연합군을 격파하고 더블린을 점령했다. 시그트리그 실크비어드는 더블린으로 돌아가 브리안에게 복종했으며, 브리안은 시그트리그의 딸과 결혼하고, 자신의 딸을 에오가나흐타 왕 씨안에게 시집보내는 등 화해 정책을 펼쳤다.
브라이언은 이후 10여 년간 아일랜드 전역을 통일하기 위한 원정을 계속했다. 1005년과 1006년에는 섬을 두 바퀴 완주하며 자신의 결단력을 보여주었다.[51] 그는 최고 왕 칭호를 얻기 위해 얼스터 지역 통치자들과 10년간의 전쟁을 벌였다. 북부 오닐과 울라드는 강력한 저항 세력이었으나, 브라이언은 해상 지원과 크라에브 텔차 전투를 통해 유리한 위치를 점했다. 1005년 에마인 마차에서 울라드의 항복을 받았으나, 플라히베르타흐 우아 네일은 계속해서 브리안에게 반항했다. 브라이언은 플라히베르타흐를 제압하고 그의 딸과 결혼시키는 등 유화책을 썼지만, 플라히베르타흐는 1009년 티르 코닐 왕의 눈을 멀게 하는 등 문제를 일으켰다. 결국 브라이언은 플라히베르타흐를 완전히 굴복시키고 1011년 케넬 코닐의 항복을 받아냈다.
브라이언은 육상과 해상 군대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얼스터를 정복했다. 그는 아르마 수도원에 금을 기증하고 아일랜드의 종교적 수도로 선포하여 자신의 통제를 공고히 했다.[25] 그는 ''아르마의 책''에서 '게일족의 황제'로 선포되었다. 1011년, 브라이언은 아일랜드 전체의 인정을 받았으나, 곧 이를 잃게 되었다.
브리안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있다. 영웅적인 전투 중 사망했다는 주장과 노령으로 인해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다.[34] Cogadh Gaedhel re Gallaibh에 따르면, 브라이언은 클론타르프에서 기도하던 중 맨 섬의 바이킹 용병 브로디르에게 살해당했다.[36][37][38] 그는 꿈에서 반시의 경고를 받았다고 한다.[39] 브로디르는 이후 잔인하게 고문당해 죽었다.[41] 브라이언의 시신은 아마의 대성당에 묻혔다.[42] 그의 시신이 먼스터로 옮겨졌다는 보고도 있다.[43] 브라이언의 사후, 마엘 세크나일 막 도브나일이 최고 왕위를 되찾아 1022년까지 통치했다.[44][45]
4. 1. 중세 아일랜드의 주요 인물
달 가이스는 마흐가마인이 죽은 후에도 강력한 세력으로 남았다. 마흐가마인의 뒤를 이어 토몬드의 왕이 된 브라이언은 그의 형 못지않은 훌륭한 군사 지휘관임을 빠르게 증명했다. 977년, 약해진 이바르를 공격하여 죽인 후, 브라이언은 문스터에 남아있는 바이킹 세력을 몰아내려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왕위에 오른 이바르, 즉 리머릭의 통치자는 죽은 이바르에게 충성을 바쳤고, 아들들과 함께 섀넌 강 하구로 배를 타고 도망쳐 이니시 캐타이그(스캐터리 섬)의 수도원에 피신했다. 그러나 브라이언은 형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신성한 전통을 무시하고 병사들을 이끌고 섬을 공격하여 바이킹을 학살하고 교회를 훼손했다.[17]978년경, 브라이언은 벨라흐 레크타 전투에서 마엘 무아드와 싸워 그를 격파했다. 마엘 무아드는 이 전투에서 죽었고, 그 후 에오가나흐타 가문은 더 이상 지방 왕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따라서 문스터의 왕위는 달 가이스로 넘어갔고, 브라이언이 왕이 되었다.
이후 문스터에 남아 있던 마지막 저항 세력은 마흐가마인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도누반(도노반)이 이끄는 아일랜드인과 이바르의 마지막 남은 아들이자 후계자로 지명된 아랄트(해롤드)가 이끌었을 가능성이 있는 노르드/바이킹 세력의 연합이었다. 브라이언은 카히르 쿠안 전투에서 그들을 공격했는데, 이는 단일 전투였을 수도 있고 977~978년 기간 동안의 장기간의 분쟁이었을 수도 있다. 이 사건은 연대기에 언급되어 있으며, 후대의 자료인 '코가흐'는 브라이언이 그의 적들에게 "대대적인 학살"을 가하여 도누반과 아랄트를 모두 죽이고, 그의 지방 내 지위를 확고히 했다고 묘사한다.[18]
그러나 브라이언은 일부 노르드족이 그들의 정착지에 남도록 허용했는데, 그들이 부유했고, 특히 노예 무역으로 지역 무역의 중심이었으며, 브라이언이 나중에 해군 원정에 사용할 가치 있는 함대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38]
키안은 브라이언의 형 마흐가마인의 숙적 마엘 무아드의 아들로, 나중에 브라이언의 충실한 동맹이 되어 여러 원정에서 그를 섬겼다.
4. 2. 논쟁적인 역사적 평가
지난 250년 동안 아일랜드의 바이킹 시대와 클론타르프 전투에 대한 역사가들의 논쟁이 있었다. 일반적인 관점은 브리안 보루가 아일랜드와 바이킹 간의 전쟁을 종식시키면서 아일랜드에서 바이킹의 세력을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정주의 역사가들은 이를 브리안 보루의 먼스터와 그 동맹군이 레인스터와 더블린을 물리친 아일랜드 내전으로 보고 있으며, 양측에서 바이킹들이 싸웠다고 본다.[46][47] 2018년 1월, 코번트리 대학교, 옥스퍼드 대학교, 셰필드 대학교 연구원들은 12세기 ''코가드 게이델 레 갈라이브'' ("게일족과 외국인, 즉 덴마크인 및 기타 노르드인과의 전쟁")을 네트워크 과학을 사용하여 수학적으로 분석한 논문을 ''로열 소사이어티 오픈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이 논문은 약 300명의 등장인물 간의 1000개 이상의 관계를 나열하고 아일랜드인과 게르만계 노르드인 간의 전쟁에 대한 일반적인 관점이 대체로 옳았지만, "완전히 '명확하게 구분되는' 아일랜드 대 바이킹 갈등"보다 더 복잡하다는 결론을 내렸다.[46][47] 그러나 논문의 공동 저자 중 한 명은 "우리의 통계적 분석은 ... 논쟁을 결정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47]
브리안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 즉 '덴마크' (바이킹) 점령에서 땅을 해방하기 위해 아일랜드의 지역 지도자들을 통합한 통치자는 브리안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코가드 게이델 레 갈라이브''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 이 작품은 브리안의 증손자인 뮤르체르타흐 우아 브리안이 우이 네일 가문이 거의 독점했던 하이 킹십에 대한 우이 브리안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의뢰한 것으로 여겨진다.
1970년대까지 바이킹의 아일랜드 활동과 브리안 보루의 경력에 대한 대부분의 학술 저술은 ''코가드 게이델 레 갈라이브''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브리안은 바이킹에게 완전히 정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일랜드를 노르드 (바이킹) 점령에서 해방시키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바이킹과 바이킹이 세운 정착지에 대한 지속적인 갈등을 보였으며, 후자는 모두 약탈자들이 아일랜드 내륙으로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세워졌다. 8세기 후반 노르드 약탈자들은 아일랜드의 목표물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9세기 중반부터 이 약탈자들은 나중에 아일랜드 최초의 도시로 성장한 요새화된 캠프를 세웠다: 더블린, 리머릭, 워터포드, 웩스포드, 코크. 불과 몇 세대 만에 일부 노르드는 기독교로 개종하고 아일랜드인과 결혼하여 종종 아일랜드어, 복장 및 관습을 채택하여 역사가들이 히베르노-노르드라고 부르는 존재가 되었다.[50]
그러한 히베르노-노르드 도시는 브리안이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아일랜드의 정치적 상황에서 불안정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들은 종종 아일랜드 통치자들의 공격을 받았고 다른 사람들과 동맹을 맺었다. 처음에는 아일랜드를 공격하고 나중에는 정착한 노르드는 아일랜드인에 의해 부분적으로 동화되었다.[51]
4. 3. 대중문화 속의 브리안 보루
지난 250년 동안 아일랜드의 바이킹 시대와 클론타르프 전투에 대한 역사가들의 논쟁이 있었다.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관점은 브리안 보루가 아일랜드와 바이킹 간의 전쟁을 종식시키면서 아일랜드에서 바이킹의 세력을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정주의 역사가들은 이를 브리안 보루의 먼스터와 그 동맹군이 레인스터와 더블린을 물리친 아일랜드 내전으로 보고 있으며, 양측에서 바이킹들이 싸웠다고 본다.[46][47] 2018년 1월, 코번트리 대학교 이론 물리학 교수 랄프 케나를 필두로 코번트리, 옥스퍼드, 셰필드 대학교 연구원들은 12세기 ''코가드 게이델 레 갈라이브''( "게일족과 외국인, 즉 덴마크인 및 기타 노르드인과의 전쟁")을 네트워크 과학을 사용하여 수학적으로 분석한 논문을 저널 ''로열 소사이어티 오픈 사이언스''에 발표했는데, 이 논문은 약 300명의 등장인물 간의 1000개 이상의 관계를 나열하고 아일랜드인과 게르만계 노르드인 간의 전쟁에 대한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관점이 대체로 옳았지만, 그림은 "완전히 '명확하게 구분되는' 아일랜드 대 바이킹 갈등"보다 더 복잡하다는 결론을 내렸다.[46][47] 그러나 논문의 공동 저자 중 한 명인[48] 박사 과정 학생 조셉 요세는 "우리의 통계적 분석은 ... 논쟁을 결정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47]
수정주의 이론은 브리안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 즉 '덴마크' (바이킹) 점령에서 땅을 해방하기 위해 아일랜드의 지역 지도자들을 통합한 통치자는 브리안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코가드 게이델 레 갈라이브''의 강력한 영향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브리안의 증손자인 뮤르체르타흐 우아 브리안이 우이 네일 가문이 거의 독점했던 하이 킹십에 대한 우아 브리안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의뢰한 것으로 여겨진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뮤르체르타흐의 동시대인이자 사촌인 브리안 글린 마디르 또는 적어도 브리안의 아들 돈차드의 후손에게 호의적인 사람이 의뢰했을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49]
이 책이 학자들과 대중 저술가들에게 미친 영향은 과장할 수 없다. 1970년대까지 바이킹의 아일랜드 활동과 브리안 보루의 경력에 대한 대부분의 학술 저술은 ''코가드 게이델 레 갈라이브''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브리안은 바이킹에게 완전히 정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일랜드를 노르드 (바이킹) 점령에서 해방시키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바이킹과 바이킹이 세운 정착지에 대한 지속적인 갈등을 보였으며, 후자는 모두 약탈자들이 아일랜드 내륙으로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세워졌다. 8세기 후반 10년 동안 노르드 약탈자들은 아일랜드의 목표물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9세기 중반부터 이 약탈자들은 나중에 아일랜드 최초의 도시로 성장한 요새화된 캠프를 세웠다: 더블린, 리머릭, 워터포드, 웩스포드, 코크. 불과 몇 세대 만에 일부 노르드는 기독교로 개종하고 아일랜드인과 결혼하여 종종 아일랜드어, 복장 및 관습을 채택하여 역사가들이 히베르노-노르드라고 부르는 존재가 되었다.[50]
그러한 히베르노-노르드 도시는 브리안이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아일랜드의 정치적 상황에서 불안정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들은 종종 아일랜드 통치자들의 공격을 받았고 다른 사람들과 동맹을 맺었다. 처음에는 아일랜드를 공격하고 나중에는 정착한 노르드는 아일랜드인에 의해 부분적으로 동화되었다.[51] 그러나 브리안의 아버지는 리머릭의 노르드인에게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 자신은 여러 바이킹 지도자, 특히 맨 섬의 노르드인이 지원한 반란 중에 사망했다.
그의 이름은 아일랜드 전통 레퍼토리에서 가장 오래된 곡 중 하나인 "브라이언 보루의 행진곡"의 제목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 곡은 여전히 많은 아일랜드 전통 음악가들에 의해 널리 연주되고 있다. 그는 적어도 두 개의 오페라의 주제가 되었다. 요한 베른하르트 로기어(1777–1846)가 작곡한 ''브라이언 보로이메''(1810)와 줄리안 에드워즈(1855–1910)가 작곡한 ''브라이언 보루''(1896)가 그것이다. 그의 세인트 패트릭 대성당 묘지는 토마스 P. 키난(1866–1927)의 노래 "아마 군 출신 소년들"에서 언급된다. 그의 전투에서의 활약은 아일랜드 민속 메탈 밴드 크루아찬의 노래 ''전쟁을 위해 태어남(브라이언 보루의 부상)''의 영감이 되었다.
그는 아일랜드 전통 음악 레퍼토리에서 가장 오래된 곡조 중 하나인 "브라이언 보루의 행진곡"이라는 곡의 이름으로 남아있다. 이 곡조는 아직도 아일랜드 전통 음악가들에게 널리 연주되고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아이리시 하프는 ''브라이언 보루의 하프''라는 이름으로 불리며[78], 더블린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도서관에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캐나다의 TV 프로그램 ''유물 헌터(Relic Hunter)''에서는 "아일랜드의 마지막 왕" 브라이언 보루의 잃어버린 왕관을 찾는 내용이 방송되었다.
에드워드 러더퍼드(Edward Rutherfurd)는 역사 소설 ''아일랜드의 왕자: 더블린 사가''의 한 장을 브라이언 보루에게 할애했다. 여기서는 브라이언이 텐트 안에서 기도하다가 죽었다는 설을 채택했다.
브라이언 우드(Brian Wood)의 버티고 만화 소설 시리즈 ''노스랜드(Northlanders)'' 2권은 클론타프 전투를 포함하여 바이킹의 아일랜드 "점령"을 배경으로 한다.
디즈니 영화 ''다비 오길과 작은 사람들(Darby O'Gill and the Little People)''에서 레프러콘의 왕 브라이언 코너스는 데인인(바이킹)을 쫓아내는 데 사용된 검 브라이언 보루를 다비에게 보여준다.
프로레슬러 셰이머스는 캐릭터 킹 셰이머스의 홍보를 중단하는 동안 여러 번 브라이언을 언급했다.
브라이언 보루의 마지막 전투와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프랭크 딜레이니(Frank Delaney)의 소설 ''아일랜드''에서 다루어진다.
존 마이어스 마이어스(John Myers Myers)의 소설 ''실버록(Silverlock)''(1949년)에서는 주인공의 시점에서 브라이언 보루의 죽음을 묘사하고 있다.
SF 텔레비전 드라마 ''스타 트렉: 딥 스페이스 나인''의 등장인물 중 하나인 마일즈 오브라이언은 시즌 4 에피소드 "변호사 협회"에서 자신이 브라이언 보루의 직계 후손이라고 말한다.
아일랜드 최대의 아마추어 스포츠 단체인 게일식 체육 협회(GAA, Gaelic Athletic Association)에서는 게일식 풋볼, 헐링, 카모기, 게일식 핸드볼 등 많은 클럽이 브라이언 보루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하지만 일부는 해산되었다.) [79]
국가 | 지역 | 클럽 이름 |
---|---|---|
아일랜드 | 퍼마나 주 | 키나울리 |
아일랜드 | 티퍼레리 주 | 클로진 레이디스, 아나카르티 = 도노힐 헐러스, 브라이언 보루 카모기 클럽 |
아일랜드 | 웨스트미스 주 | 발리모어 |
아일랜드 | 리트림 주 | 가버 |
아일랜드 | 코크 주 | 샨볼리모어 |
아일랜드 | 로스코먼 주 | 스트로크타운 |
아일랜드 | 더블린 주 | 클론타프, 브라이언 보루즈 핸드볼 |
아일랜드 | 앤트림 주 | 쿠셴던 |
아일랜드 | 클레어 주 | 크래틀로=킬라로 |
잉글랜드 | 런던 | |
미국 | 펜실베이니아 주 | 필라델피아 헐링 클럽 |
미국 | 오리건 주 | 포틀랜드 헐링 클럽 |
브라이언 보루의 유해 발굴은 2014년 4월 1일 '학술' 기사의 주제였다.(실제로는 잘 만들어진 만우절 장난 기사이다.)[80]
도날 오닐(Donal O'Neill)의 브라이언 보루에 관한 역사 소설 ''죽음의 아들들''(Sons of Death, 1988년)은 브라이언의 왕궁의 젊은 귀족 멜패트릭(MelPatrick)의 시점에서 이야기한다. 픽션으로서 옛날에 잃어버린 ''브라이언의 사가''를 출처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 소설은 서기 800년경에 시작하는 아일랜드의 역사를 기반으로 한 시리즈의 3권이다.(1권 ''도가니''(Crucible), 2권 ''신들과 인간들''(Of Gods and Men))
모건 르웰린(Morgan Llywelyn)은 ''아일랜드의 사자(Lion of Ireland)''라는 제목으로 브라이언의 생애를 소설화했다. 속편 ''사자들의 긍지(Pride of Lions)''는 그의 아들 도노(Donough)와 티그(Teigue)의 왕관을 둘러싼 싸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5. 가족 관계
브라이언 보루는 케네티그 막 로르칸 (951년 사망)과 서부 코넛의 마이 쇼라의 왕 우르카 막 무르카 (945년 사망)의 딸인 베 빈 이눈 우르카 사이에서 태어났다.[8][9] 그의 가족은 달 가이스(또는 Deis Tuisceart)의 Ui Tairdelbach 지파 출신이었다.[10]
브라이언은 여러 명의 아내와 자녀를 두었다.
브라이언의 후손들은 오브라이언 가문 (Uí Briain)으로 알려졌으며, 아일랜드의 주요 왕조 가문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6. 족보
브리안 보루의 계보[58] | ||
---|---|---|
1. 브리안 보루, 아일랜드의 최고왕 | 2. 케네디 막 로르케인, 톰몬드의 왕 | 3. 베 빈 인겐 우르카 |
4. 로르케인 막 라흐트나 | 6. 참조
[1]
웹사이트
Keating and the King in Print (1723)
https://dh.tcd.ie/cl[...]
Trinity College, Dublin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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